서양 중세의 사회와 문화 본문
서양 중세의 사회와 문화
- 2025. 4. 22. 12:56
유럽 중세
- 자신들이 온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근세가 시작되던 15세기까지 약 천 년간의 중세봉건시대
- 중세문화는 로마문화와 게르만 전통이 융합된 결과 로마카톨릭교회가 문화적 융합과정 주도
- 중세시대를 통해서 유럽의 근대적인 요소가 출현하고 국가들 사이의 지역적 구분과 국가를 이루는 제도와 요소들이 마련됨
중세 봉건사회의 구성원들
- 기도하는 사람들(성직자)
- 싸우는 사람들(봉건귀족)
- 일하는 사람들(농민과 도시민)
1. 가톨릭교회의 성장과 분열
1. 프랑크왕국의 번성과 로마 카톨릭교회
- 서로마제국 몰락 후 로마교구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통제를 받음
- 로마의 주교는 게르만족을 포교하면서 지위가 상승하고 동로마 황제에 대해서 차츰 독립적인 지위 획득
-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우상파괴령(726년) :
- 게르만족 포교 위해 사용한 성상을 우상숭배라고 해서 금함 - 프랑크왕국의 찰스 마르텔이 피레네산맥에서 이슬람교도 격퇴(732년) :
- 동로마제국을 대신할 교회의 보호자로서 프랑크왕국 부각 - 서로마제국의 부활(800년)은 서유럽의 기독교화를 의미 :
- 로마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리 -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중심을 가진 타원형 구조의 세계 성립
- 게르만문화와 로마문화가 기독교 신앙으로 묶인 새로운 문명의 형성
- 로마 교황으로서 서유럽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을 통괄하는 최고수장
2. 중세 봉건사회의 위계 속 카톨릭교회의 위상
- 로마 카톨릭교회는 종교적, 세속적인 지배자로서 봉건사회의 피라미드 안에 편입됨
-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군, 봉신, 대토지소유자로서 특권과 의무 행사
- 정치, 세속적으로도 제후와 마찬가지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서 주민 통치
3. 성속의 갈등과 싸움
- 서임권투쟁 : 성속 갈등이 집약적으로 폭발한 사건
- 성직은 십일조, 헌금, 수수료, 영지 수입 등을 거두는 좋은 수입원
- 로마교회는 황제의 보호를 필요로 하면서 세속 권력의 개입 초래
- 샤를마뉴(서로마제국 황제)와 오토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회에게 충성 서약 요구
- 성직매매, 뇌물수수 등 교회의 타락 양상 출현
- 클뤼니 수도원 수도사들은 타락한 교회에 대한 개혁운동 주도
- 교회 세속화 및 세속통치자의 성직자 임명권 장악을 교회 타락 원인으로 간주 - 교황 그레고리 7세(클뤼니 수도원 출신, 재위 1073-1085)는 성직 서임권 장악 시도
- 서임권 투쟁(1077년) :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성직서임권을 놓고 벌인 권력 다툼
-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
-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가 머무는 카노사 성 앞에서 사죄 (카노사의 굴욕 1077년)
-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공격하고 교황 그레고리 7세를 폐위 (1084년) - 12세기 초 교황과 황제의 타협
- 황제는 주교 서임권을 포기하고 주교령 수여 권리만 행사 → 주교는 황제의 봉신이 됨
- 황제는 세속적인 통치만, 교황은 종교적인 통치만 - 이후 권력의 무게중심이 속권에서 교권으로 이동(교황권의 강화)
- 중세 교회는 11세기 말부터 13세기에 유럽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십자군전쟁 종식을 고비로 13세기 말부터 쇠퇴
4. 교회의 분열
- 14세기초부터 성직자에 대한 과세권, 재판권을 둘러싸고 교황과 국왕사이의 갈등은 교회의 쇠퇴와 분열의 배경
- 아비뇽의 유수 (1305 - 1378년) :
- 프랑스왕 필립 4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서 70여 년 간 교황을 임명하고 통제 -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아비뇽교황청과 로마교황청이 맞서는 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남
-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 :
- 보편교회주의에서 국가교회주의로의 이행
- 국왕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원칙 확립
2. 봉건제도의 성립
5. 카롤링 왕조
- 732년 프랑크왕국의 카를 마르텔, 피레네산맥에서 이슬람 방어 (1-1 참고)
→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기독교 문명 방어 - 751년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었던 피핀은 로마교황의 지원을 얻어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등극
- 800년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로마제국 황제로 축성됨
6. 서로마제국의 이념과 그 의미
- 서로마제국의 부활 :
- 로마제국 서쪽의 영토에 라인강 이북의 게르만 고토 추가 - 샤를마뉴의 이상 :
- 신정적 이념 : 황제가 교회를 지배하고 성직자를 임명하며 감독한다.
- 비잔틱적 이념 : 지방관을 통해 황제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다. - 서로마제국의 현실은 샤를마뉴가 임명한 지방관들이 점차 봉건영주화함
- 비잔티움 제국 :
- 고대 그리스 문화와 고대 로마의 법을 보존하여 아랍과 유럽사회에 전파
- 동방정교회의 본산으로 그리스, 슬라브, 러시아에 정교 문화 전래
7. 봉건사회의 의미 및 성립과정
- 476년 로마제국 몰락 이후 무질서 상태에 있던 유럽
- 지방의 유력자들은 주민 보호를 위한 성곽을 쌓고 통치자가 되어 권력을 행사함
- 중세유럽봉건사회 :
- 샤를마뉴 제국의 영토에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추가한 공간
- 동쪽 경계는 독일의 엘베강 (오늘날의 서부독일지역까지 포함)
8. 봉건사회의 사람들과 제도
- 봉건사회의 특징 :
1. 주종제도 : 주군과 봉신 간의 연쇄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조직
- 최고 주군으로서의 국왕은 자신의 봉신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그 봉신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음
- 주종관계는 대등한 사이에서 맺는 1대1 계약으로 같은 권리와 의무를 주고 받음
2. 지방분권적인 통치제도 :
- 국왕은 지방 유력자들의 지배 범위에 간섭할 수 없었고,각 지역에서는 지방 유력자들이 자율적으로 통치
9. 중세 봉건사회의 장원제
- 봉토는 정치, 군사적인 의미의 용어
- 봉토 : 군사력의 보유자인 기사들이 실제적으로 확보했지만, 다시 주군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하사 받고 인정받은 땅
- 영지는 통치영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용어
- 영지 : 기사들은 봉토를 영지로 만들고, 영주로 군림하면서 주민들을 통치하고 인신적으로 지배
- 장원은 지배계급의 위계조직을 지탱하는 경제적 기반
- 영지의 영주인 기사 혹은 귀족은 장원의 지주로서 자신의 땅을 임차하는 농민들에게 노동을 시키면서 경제적 잉여 수취
10. 장원의 영주와 농민의 관계
- 장원의 농민 :
- 그 지역의 영주에게 예속된 존재
- 제반 세금을 바치고 거주 이전의 자유 없음
- 결혼해서 가족을 거느렸고 공동체적인 권리를 가짐
- 삶의 조건이 변화할 가능성
3. 중세의 농촌과 도시
11. 10 ~ 11세기 유럽 중세 사회의 변화
- 봉건사회의 안정으로 농업생산 증대
- 동유럽지역의 봉건화
- 중세상업 및 중세도시의 출현
- 지중해 무역권의 활성화로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출현
12. 중세 도시민, 봉건영주, 농민 간 교류
- 중세도시는 봉건사회의 이질적인 존재였으나 사회의 변화 촉구
- '자유로운 공기'로 농민들에게 피신처 제공, 농촌과의 유대
- 북서부 유럽의 모직물산업 발달로 북유럽과 지중해의 무역권이 연결되어 각 지역에 도시망이 형성
4. 중세의 조락
13. 십자군전쟁 (11세기 말 ~ 13세기 말)
- 교황의 주도로 기독교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통합을 통한 주도권 강화 의도
- 교황은 세속군주 및 봉건 기사들의 영토에 대해 관심을 끌어들임
- 교황은 순례를 명분으로 유럽 대중의 종교적 열정을 동원
- 십자군전쟁의 탈선 :
- 세속통치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상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탈선
- 1204년 4차 십자군은 비잔티움제국을 사실상 와해시킴 - 십자군전쟁의 결과 : ★ ★ ★ ★ ★
- 교황과 교회의 권위 추락 → 교회의 분열과 타락
- 봉건귀족의 약화
- 국왕의 세력 강화(시민계층의 성장으로 국왕과 제휴하여 봉건귀족 견제)
- 전쟁으로 동서교역의 확대
- 중세사회의 쇠퇴 촉진
- 이슬람과 유럽인들의 상호 갈등 초래
14. 중세말 서유럽사회의 위기
- 십자군전쟁이 끝나가는 13세기말부터 중세유럽의 침체
- 농업생산성 감소 → 농촌과 도시의 경제 위축
- 흑사병의 창궐로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됨
15. 농민해방
- 귀족들의 봉건 반동에 대항하는 농민의 봉기는 농민공동체가 중요 결속력 제공
- 대표적인 농민 봉기 :
- 1358년 프랑스의 자끄리의 난
- 1381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 - 15세기 말 서유럽 대부분의 농노들 해방됨
- 동유럽의 재판농노제 :
- 15세기 중엽 이후 귀족들은 영주권 강화, 직영지 경영과 곡물수출을 통해 번영
- 농민들은 농노신분으로 전락 - 동유럽 촌락공동체의 약체성, 도시 발달의 미미성, 취약한 왕권
- 독일농민전쟁(1524년 ~ 1525년) 이후 독일 농노제 지속(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농노제 폐지)
16. 봉건전쟁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 봉건전쟁은 중세말 수입이 줄어든 영주들의 영지 확장 전쟁
- 대표적인 사례로는 14세기 중엽,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발생한 백년전쟁과 15세기 후반 영국 봉건 귀족들 사이에서 나타난 장미전쟁 - 봉건귀족의 세력 약화
- 도시 시민은 관료로 진출하여 왕의 의지 대리 (특히 전국적 징세 실현)
- 왕권의 중앙집권화 및 국가적인 통합 촉구
17. 중세 말 유럽 각국의 상황
-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의 승리 후 점진적인 국가 통합
- 영국은 백년전쟁에서 패배,
장미전쟁(1455 ~ 1485년) 투더 왕조의 중앙집권적 국가 출현 - 에스파냐와 포루투갈은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국가적 통합
- 독일은 지방의 봉건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국가 통합을 이루지 못함
- 이탈리아는 영토의 중간부분을 로마 교황령이 차지하고 있어 결국 분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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