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의 이해 본문

공부는 끝이 없다/세계의 역사

프랑스혁명의 이해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

 

 

1. 프랑스혁명의 배경

1-1. 구체제(절대왕정 국가 - 혁명 직전)

  1. 구체제의 모순: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질서에서 찾을 수 있음
  2. 제 1신분: 성직자집단
    • 1인당 토지 소유 규뮤로 프랑스 최대 지주집단
    • 고위 성직자(귀족) · 하급 성직자(평민) 사이의 신분 차이로 동질적 집단으로 보기 어려움
  3. 제 2신분: 귀족집단
    • 혈통에 따른 구귀족, 관직 · 재산을 통해 귀족 신분을 얻은 부르주아 출신의 신귀족
    • 귀족의 반동: 절대주의 초기에 갈등하던 두 집단은 루이 14세 사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결집, 귀족의 반동 주도
  4. 제 3신분: 앞의 두 계급을 제외한 프랑스인 전체
    • 상층부: 시민계급인 부르주아지
    • 도시 제 3신분: 대다수가 상퀼로트 → 중세 도시 장인의 후예로 내부 편차가 큼
    • 농촌 제 3신분: 농민 → 부유한 자영농, 영세자영농, 소작농, 농업노동자 등 구성이 복잡함. 시대착오적 봉건제에 공통적인 불만
    • 상퀼로트 · 농민은 경제적 위기로 타격  사회적 불안 · 불만에서 절대왕정에 대한 분노로 변화
상퀼로트: 귀족이 아닌 사람을 지칭(농민도 포함되지만 주로 도시의 서민을 지칭)

 

1-2. 왕실의 재정위기

  1. 전형적 절대주의 국가 프랑스
    • 루이 15세 치세: 산업과 농업이 낙후되고 대외전쟁 · 식민지경쟁에서 밀려남  재정결손
    • 미국 독립전쟁 지원: 위기에 몰린 프랑스 재정 결정적 악화
    • 네케르: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 시도  고등법원의 반발

 

1-3. 삼부회의 소집과 결렬

  1. 삼부회: 중세때 국왕이 자신의 결정, 특히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열었던 신분제 회의(성직자, 귀족, 도시의 시민으로 구성)
  2.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 소집  절대권력의 한계 노출  혁명의 시발점
  3. 전개: 제3신분이 국왕 승인을 받아 대표자 수 배가 성공  신분별 표결과 머릿수 표결을 두고 타협 실패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로 국민의회 결성  테니스 코트의 선언

 

 

2. 혁명의 발발과 전개

2-1. 민중의 동원

  1. 초기의 전개: 루이 16세가 외국인 용병부대 베르사유 주둔  파리 민중이 국민방위대 조직, 자치 선언 →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농촌에서 7~8월 사이 대공포 만연
  2. 소요의 의의: 도시민 · 농민의 정치의식 자극, 정치적 동원

 

2-2. 군주정과 공화정을 둘러싼 논쟁

  1. 봉건제 폐지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국민의회가 농민 지지를 얻이 위해 시도
    • 한계: 봉건제 부담의 핵심인 지대와 물납연공을 되사기 형식으로 폐지
    • 의의: 구체제를 새로운 질서로 대체
  2. 국민의회의 개혁(1791년 9월 "1791년 헌법" 제정) :
    - 교회 토지 국유화
    - 성직자민사기본법 제정(1790년 7월)
    - 성직자의 시민선서 요구
    - 내국관세와 통행세 폐기 및 사법구역과 행정구역 정리
    - 고등법원 폐지
  3. 10월 폭동과 국왕의 개혁 인가
파리 여성들의 10월 폭동(1789년 10월) :
국왕에게 "봉건제 페지선언", "인권선언" 승인을 얻어냈으며, 반혁명을 차단한 정치적 효과를 거둠

 

2-3. 공화정의 수립

  1. 국왕의 오스트리아 도피에도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정 지지 → '91년 헌법'(유산계급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의 체제 수립)
  2. 입법의회: 군주정과 공화정에 대한 논의로 분열
    • 푀이양파: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입헌군주제와 자유 경제 추구
    • 지롱드파 · 자코뱅파: 공화정 추구
  3. 혁명전쟁 개시(1792): 자코뱅파를 제외지롱드파, 퐈이양파, 국왕이 전쟁 찬성
    • 의용군 소집: 민중의 혁명 열기를 부추김
    • 파리민중이 입법의회 압박하여 왕정 정지
    • 1792년 8월 20일: 발미전투의 승리, 프랑스 제1공화정 수립, 국민공회 시작

 

2-4. 자코뱅 독재의 확립

  1. 폐위된 국왕의 처형: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결정적 분열
  2. 자코뱅 독재의 확립: 불리한 전세, 경제위기의 심화, 방데의 반혁명봉기  자코뱅파가 도시 상퀼로트의 지지를 업고 권력 장악 지롱드파 숙청, 자코뱅 독재 확립
  3. 93년 헌법: 보통선거권, 노동권, 생존권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 실시 보류
  4. 봉건제 무상폐지: 빈농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음
  5. 공포정치
    • 영국군의 툴롱 함락에 자극을 받은 민중이 국민공회 습격 → 공포정치 시작
    • 생필품 최고가격제 실시
    • 국민공회 내 분파 숙청과 공포정치의 종식:
      - 상퀼로트와의 연합을 담보했던 에베르파와 격앙파 제거
      - 이후 당통과 관용파 제거
      -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통해 체포, 숙청

 

 

3. 혁명의 쇠퇴와 종식

  1. 유산계급에 입각한 총재정부 수립
    • 프레리알 봉기: 혁명 최후의 민중봉기로 실패
    • 국민방위대는 부르주아로만 구성
    •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 총재정부가 군대에 의존
  2. 통령정부
    • 혁명군 지휘자였던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 수립
    • 나폴레옹: 혁명의 계승자보다는 군사적 정복자. 혁명성과 수용, 프랑스 사회제도 기틀 마련

 

 

4. 프랑스혁명과 성과

  1. 인간의 제반 자유와 권리 증진
  2. 국내 경제 통합, 자유로운 경제활동 보장 → 자본주의 발달 촉진
  3. 정치적 평등 · 법적인 평등: 인권선언, 상퀼로트의 직접민주주의 시도는 프랑스 시민의 법적 평등과 동일 기준에 따른 중앙집권화의 실험
    - 한계: 보통선거의 실시는 1848년 제2공화정 수립 이후에나 가능
  4. 사회 · 경제적 평등 개념 배태: 사회주의 사상의 기원
    - 자코뱅파의 이상적 국가: 독립적 소생산자의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국
  5. 혁명의 결과: 독립적 토지 소유농 출현, 부르주아사회 수립

 

 

5. 프랑스혁명의 해석

수정주의적 해석: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정치혁명으로 축소

수정주의적 해석의 함의

  1. 프랑스혁명 전에 하나의 사회, 경제적인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2. 귀족과 부르주아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3. 민중의 개입으로 일탈이 일어나면서 혁명으로 비화되었다.
  4. 1792년 왕정 폐지 이후의 사태는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5.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 아니라 기껏해야 유산계급의 혁명에 불과하다.

 

정통파 해석의 함의

  1. 계급의 복합성: 단순히 사회경제적 상황만이 아니라 지위와 신분, 체계화된 의무, 특권 등 제반 요인 작용
  2. 구체제의 부르주아지는 자연스럽게 혼합된 성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3. 귀족들의 반동(봉건 특권에 대한 요구와 관직의 독점)에 주목(귀족과 부르주아지와 구별된다)
  4. 표결방법을 둘러싼 귀족 대표와 제 3신분 대표의 대립은 화해될 수 없는 것으로 농민과 도시민의 동원을 촉구하고, 혁명을 발발시켰다.

 

두 해석의 일치

  1. 프랑스 혁명이 근대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룬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2. 프라승 혁명은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르주아사회가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 희망이라는 미완의 이념 상징

 

 

 

반응형

공부는 끝이 없다/세계의 역사 R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