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의 이해 본문
프랑스혁명의 이해
- 2025. 4. 30. 14:42
1789년 7월 14일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
1. 프랑스혁명의 배경
1-1. 구체제(절대왕정 국가 - 혁명 직전)
- 구체제의 모순: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질서에서 찾을 수 있음
- 제 1신분: 성직자집단
- 1인당 토지 소유 규뮤로 프랑스 최대 지주집단
- 고위 성직자(귀족) · 하급 성직자(평민) 사이의 신분 차이로 동질적 집단으로 보기 어려움
- 제 2신분: 귀족집단
- 혈통에 따른 구귀족, 관직 · 재산을 통해 귀족 신분을 얻은 부르주아 출신의 신귀족
- 귀족의 반동: 절대주의 초기에 갈등하던 두 집단은 루이 14세 사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결집, 귀족의 반동 주도
- 제 3신분: 앞의 두 계급을 제외한 프랑스인 전체
- 상층부: 시민계급인 부르주아지
- 도시 제 3신분: 대다수가 상퀼로트 → 중세 도시 장인의 후예로 내부 편차가 큼
- 농촌 제 3신분: 농민 → 부유한 자영농, 영세자영농, 소작농, 농업노동자 등 구성이 복잡함. 시대착오적 봉건제에 공통적인 불만
- 상퀼로트 · 농민은 경제적 위기로 타격 → 사회적 불안 · 불만에서 절대왕정에 대한 분노로 변화
상퀼로트: 귀족이 아닌 사람을 지칭(농민도 포함되지만 주로 도시의 서민을 지칭)
1-2. 왕실의 재정위기
- 전형적 절대주의 국가 프랑스
- 루이 15세 치세: 산업과 농업이 낙후되고 대외전쟁 · 식민지경쟁에서 밀려남 → 재정결손
- 미국 독립전쟁 지원: 위기에 몰린 프랑스 재정 결정적 악화
- 네케르: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 시도 → 고등법원의 반발
1-3. 삼부회의 소집과 결렬
- 삼부회: 중세때 국왕이 자신의 결정, 특히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열었던 신분제 회의(성직자, 귀족, 도시의 시민으로 구성)
-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 소집 → 절대권력의 한계 노출 → 혁명의 시발점
- 전개: 제3신분이 국왕 승인을 받아 대표자 수 배가 성공 → 신분별 표결과 머릿수 표결을 두고 타협 실패 →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로 국민의회 결성 → 테니스 코트의 선언
2. 혁명의 발발과 전개
2-1. 민중의 동원
- 초기의 전개: 루이 16세가 외국인 용병부대 베르사유 주둔 → 파리 민중이 국민방위대 조직, 자치 선언 →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농촌에서 7~8월 사이 대공포 만연
- 소요의 의의: 도시민 · 농민의 정치의식 자극, 정치적 동원
2-2. 군주정과 공화정을 둘러싼 논쟁
- 봉건제 폐지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국민의회가 농민 지지를 얻이 위해 시도
- 한계: 봉건제 부담의 핵심인 지대와 물납연공을 되사기 형식으로 폐지
- 의의: 구체제를 새로운 질서로 대체
- 국민의회의 개혁(1791년 9월 "1791년 헌법" 제정) :
- 교회 토지 국유화
- 성직자민사기본법 제정(1790년 7월)
- 성직자의 시민선서 요구
- 내국관세와 통행세 폐기 및 사법구역과 행정구역 정리
- 고등법원 폐지 - 10월 폭동과 국왕의 개혁 인가
파리 여성들의 10월 폭동(1789년 10월) :
국왕에게 "봉건제 페지선언", "인권선언" 승인을 얻어냈으며, 반혁명을 차단한 정치적 효과를 거둠
2-3. 공화정의 수립
- 국왕의 오스트리아 도피에도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정 지지 → '91년 헌법'(유산계급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의 체제 수립)
- 입법의회: 군주정과 공화정에 대한 논의로 분열
- 푀이양파: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입헌군주제와 자유 경제 추구
- 지롱드파 · 자코뱅파: 공화정 추구
- 혁명전쟁 개시(1792): 자코뱅파를 제외한 지롱드파, 퐈이양파, 국왕이 전쟁 찬성
- 의용군 소집: 민중의 혁명 열기를 부추김
- 파리민중이 입법의회 압박하여 왕정 정지
- 1792년 8월 20일: 발미전투의 승리, 프랑스 제1공화정 수립, 국민공회 시작
2-4. 자코뱅 독재의 확립
- 폐위된 국왕의 처형: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결정적 분열
- 자코뱅 독재의 확립: 불리한 전세, 경제위기의 심화, 방데의 반혁명봉기 → 자코뱅파가 도시 상퀼로트의 지지를 업고 권력 장악 → 지롱드파 숙청, 자코뱅 독재 확립
- 93년 헌법: 보통선거권, 노동권, 생존권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 실시 보류
- 봉건제 무상폐지: 빈농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음
- 공포정치
- 영국군의 툴롱 함락에 자극을 받은 민중이 국민공회 습격 → 공포정치 시작
- 생필품 최고가격제 실시
- 국민공회 내 분파 숙청과 공포정치의 종식:
- 상퀼로트와의 연합을 담보했던 에베르파와 격앙파 제거
- 이후 당통과 관용파 제거
-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통해 체포, 숙청
3. 혁명의 쇠퇴와 종식
- 유산계급에 입각한 총재정부 수립
- 프레리알 봉기: 혁명 최후의 민중봉기로 실패
- 국민방위대는 부르주아로만 구성
-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 총재정부가 군대에 의존
- 통령정부
- 혁명군 지휘자였던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 수립
- 나폴레옹: 혁명의 계승자보다는 군사적 정복자. 혁명성과 수용, 프랑스 사회제도 기틀 마련
4. 프랑스혁명과 성과
- 인간의 제반 자유와 권리 증진
- 국내 경제 통합, 자유로운 경제활동 보장 → 자본주의 발달 촉진
- 정치적 평등 · 법적인 평등: 인권선언, 상퀼로트의 직접민주주의 시도는 프랑스 시민의 법적 평등과 동일 기준에 따른 중앙집권화의 실험
- 한계: 보통선거의 실시는 1848년 제2공화정 수립 이후에나 가능 - 사회 · 경제적 평등 개념 배태: 사회주의 사상의 기원
- 자코뱅파의 이상적 국가: 독립적 소생산자의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국 - 혁명의 결과: 독립적 토지 소유농 출현, 부르주아사회 수립
5. 프랑스혁명의 해석
수정주의적 해석: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정치혁명으로 축소
수정주의적 해석의 함의
- 프랑스혁명 전에 하나의 사회, 경제적인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 귀족과 부르주아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 민중의 개입으로 일탈이 일어나면서 혁명으로 비화되었다.
- 1792년 왕정 폐지 이후의 사태는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 아니라 기껏해야 유산계급의 혁명에 불과하다.
정통파 해석의 함의
- 계급의 복합성: 단순히 사회경제적 상황만이 아니라 지위와 신분, 체계화된 의무, 특권 등 제반 요인 작용
- 구체제의 부르주아지는 자연스럽게 혼합된 성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 귀족들의 반동(봉건 특권에 대한 요구와 관직의 독점)에 주목(귀족과 부르주아지와 구별된다)
- 표결방법을 둘러싼 귀족 대표와 제 3신분 대표의 대립은 화해될 수 없는 것으로 농민과 도시민의 동원을 촉구하고, 혁명을 발발시켰다.
두 해석의 일치
- 프랑스 혁명이 근대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룬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 프라승 혁명은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르주아사회가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희망이라는 미완의 이념 상징
반응형
RECENT COMMENT